제주에 '고독한 광대' 27명 두고 간 우고 론디노네

입력 2022-07-05 14:06   수정 2022-07-05 19:38



아이들의 목욕 놀이용 고무 오리 인형 '러버덕'.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막에선 수많은 러버덕이 발견된다. 길이가 620㎞에 달하는 '죽음의 사막'에 놓여진 러버덕은 놀이용에서 '생명줄'이 된다.

국경을 넘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이 뒤에 오는 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밝은색 물건들을 이정표처럼 놓아두기 때문이다.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5일 개막한 기획전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전시장. 바닥에 낡은 러버덕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그 뒤로는 공항의 출발 안내 전광판이 끊임없이 돈다. 전광판에는 60개의 문장이 차례로 등장한다. 하와이로 이주했던 사진신부, 강제 이주를 당했던 고려인, 2차 대전 수용소의 유태인, 베트남 보트피플 등의 말들이 회전한다.

이 전시의 주제는 '디아스포라와 세상의 모든 마이너리티'. 지리적, 정서적 영토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동수출국' 필리핀, 50x50작은 택배박스로 지은 집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참여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킨다. 리나 칼라트(인도), 알프레도&이자벨 아퀼리잔, 요코 오노(일본), 우고 론디노네(스페인), 강동주, 정연두, 이배경 등이 참여했다.


필리핀 출신의 부부 작가 알프레도&이자벨 아퀼리잔은 50x50x50㎝의 정육면체 박스 140개를 쌓아올린 지붕없는 집 '주소(2008)'를 전시했다. 전기포트, 인형, 낡은 책, 전화기, 옷가지 등 생활용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 박스 하나는 필리핀 우체국에서 해외로 물건을 보낼 때 세금이 면제되는 박스의 규격.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해외로 떠날 때 보낸 생활용품, 고향에서 가족들이 보내온 소중한 물건들로 차있다.

부부는 2006년 시드니 비엔날레에 초청받은 당시 두 아이를 데리고 아예 이민을 갔다.



필리핀의 해외 거주 교포는 2500만명. 하루에도 5000명씩이 이주하는 '노동수출국'이다. 한국에도 5만 명의 필리핀 이민자가 살고 있다.

알프레도는 "면세 되는 택배박스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원래 있던 터전과 지금 있는 곳을 이어주는 소통의 도구이자 고향에 대한 갈망"이라며 "이주민에게 가장 필요한 건 결국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부 받은 실제 택배박스들로 지붕 없는 집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주소 프로젝트'는 17년 전 처음 시작해 전 세계를 돌며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다.
제주에 머물며 작품 만든 정연두
세계적 아티스트 정연두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2월부터 제주에서 살았다. 그는 20세기 초 하와이로 이주한 7000여 명 조선노동자의 아내들, '사진신부'에 주목했다. 흑백 사진 한 장들고 태평양을 건너간 여성들은 당시 17~18세. 정작 이들을 맞이한 건 광활하고 뜨거운 사탕수수밭밤낮없는 혹독한 노동이었다.


작가는 제주에서 사탕수수를 직접 키우며 노동의 과정을 체험했다. 당시 사진신부와 또래였을 제주 애월고 2학년 학생들과 8차례 워크숍을 하며 이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았다.

하와이의 사진신부와 지금의 제주를 연결하는 영상과 함께 설탕공예로 조각한 사진 신부들의 초상 조각은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그 안에 있던 풋풋한 소녀들의 감성을 함께 배치시켰다.

정 작가는 "설탕공예는 설탕이 금보다 귀했을 당시 유럽 귀족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 소장하면서 유럽의 전통이 된 조각 형식이다"며 "설탕으로 인해 식민지들이 생겨나고 이주민과 노예가 생겨났다는 지점들이 이번 전시의 큰 주제와 맞닿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고 론디노네 신작, 27명의 '고독한 언어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2층에서 펼쳐지는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들이다. 제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고 깊은 휴식에 빠져 있는 27명의 광대들이 외로운 섬처럼 곳곳에 흩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화사하고 우스꽝스러운 옷차림과 화장을 하고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씁쓸하고 애잔하다.



표정은 지쳐있고, 동작엔 힘이 없다. 얼굴은 여기저기 상처가 나있다. 눈은 모두 지그시 감았다. 론디노네는 포도뮤지엄의 이번 전시를 위해 45명의 광대를 모두 다른 포즈로 제작했다. 낮잠, 한숨, 꿈, 울음, 방귀, 옷 입다 등 홀로 고립된 24시간을 표현한 단어들로 이름 붙여졌다. 전시장에는 27명의 광대가 곳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국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하려 한 걸까.



론디노네는 이 작품 외에도 창문에 무지개 빛깔의 컬러 포일을 붙여 '사랑이 우리를 만든다' 작품을 만들었다. 광대들 사이로 한낮에는 화려한 빛이 스며들어와 이들의 포즈와 대조를 이룬다.

무지개 네온 조각 '롱 라스트 해피'는 입구 하늘에 떠있어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의 하늘에서 다양한 각도로 감상할 수 있다. 묵직한 주제의 전시를 위트있게 열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포도뮤지엄은 지난해 개관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 때부터 전시 작품 중간에 ‘테마공간'이라는 미술관 자체 기획 공간을 운영했다.

이번 전시에도 5개의 테마공간을 만들었다. 전시의 주제를 관통하며 작품들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의 주소를 미디어 아트로 만든 '주소터널', 파주 스튜디오에서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 국적의 사람들과 촬영한 '이동하는 사람들', 애니메이션과 창작 음악이 접목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디파처보드', '아메리칸드림620' 등이 있다.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 디렉터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주류, 비주류로 구분되기 이전에 수많은 공통점을 가진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마련한 전시”라며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총괄 디렉터는 이번 전시를 위해 요코 오노 스튜디오에 직접 여러 차례 메일을 보내 '보트피플' 작품을 참여시켰고, 론디노네 작품 설치를 함께 진행하는 등 기획에서 설치 등의 작업을 총괄했다. 전시의 주제는 다소 무겁지만 다채로운 전시 작품과 애니메이션, 관람객 참여형 프로그램 등으로 변주를 줘 관람의 문턱을 낮췄다. 전시는 내년 7월 3일까지 계속된다.

서귀포=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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